강조가 거란과 싸운 곳은 철산군鐵山郡?


강조가 거란과 싸운 곳은 철산군鐵山郡?














==테마 음악===

https://youtu.be/NQpl9eugCv0?si=QDiwPbrAbgW4SG1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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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중초본] 147권, 광해 11년 12월 25일 갑술 2번째기사 1619년 명 만력(萬曆) 47년이시발이 국방과 국정 자강책을 건의하다  시발이 아뢰기를,




"옛날 고려(高麗) 때 거란[契丹]이 철산군(鐵山郡)에 침략해 왔을 적에 검거(劍車)로 싸워서 이겼다고 합니다. 신이 저번 관서(關西)에 있을 적에 이 수레를 만들었는데, 야전(野戰)의 기구로 적합했습니다. 이에 지금 신이 내려가서 의논하여 만들려고 합니다. 대개 박이서(朴彛叙)가 이 수레의 제도를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러 가지로 상의하여 만들도록 하라."




하였다.  時發 啓曰: "昔者高麗時, 契丹來寇鐵山郡, 以劍車勝戰矣。 臣頃在關西, 造作此車, 則可合野戰之具。 今臣下去欲爲議造 矣。 大槪 朴彛叙詳知此車制度矣。" 王曰: "多般商議爲之。"]








[ //원문


元年五月, 契丹主以兆弑君, 欲發兵問罪. 王聞之, 以兆爲行營都統使, 鉉雲及兵部侍郞張延祐副之, 起居舍人郭元, 侍御史尹徵古, 都官員外郞盧戩爲判官, 右拾遺乘里仁, 西京掌書記崔冲並爲修製官. 檢校尙書右僕射上將軍安紹光爲行營都兵馬使, 御史中丞盧頲副之, 兵部郞中金爵賢及皇甫兪義爲判官. 少府監崔賢敏爲左軍兵馬使, 少府少監崔輔成副之, 興威衛錄事高幹, 大樂丞金在鎔爲判官. 刑部侍郞李昉爲右軍兵馬使, 刑部郞中金丁夢副之, 內謁者柳莊爲判官. 禮賓卿朴忠淑爲中軍兵馬使, 禮賓少卿李良弼副之, 尙書都事高延慶·司宰注簿庾伯符爲判官. 刑部尙書崔士威爲統軍使, 戶部侍郞宋隣副之, 左司員外郞皇甫申試·兵部員外郞元穎爲判官. 率兵三十萬, 軍于通州, 以備之.




十一月, 契丹主自將步騎四十萬, 號義軍天兵, 渡鴨綠江, 圍興化鎭. 兆引兵出通州城南, 分軍爲三, 隔水而陣. 一營于州西, 據三水之會, 兆居其中. 一營于近州之山, 一附城而營. 兆以劒車排陣, 契丹兵入, 則劒車合攻之, 無不摧靡. 契丹兵屢却, 兆遂有輕敵之心, 與人彈棊. 契丹先鋒耶律盆奴率詳穩耶律敵魯, 擊破三水砦. 鎭主告契丹兵至, 兆不信曰, “如口中之食, 少則不可宜, 使多入.” 再告曰, “契丹兵已多入.” 兆驚起曰, “信乎?” 恍惚, 若見穆宗立于其後, 叱之曰, “汝奴休矣. 天伐詎可逃耶?” 兆卽脫鍪牟, 長跪曰, “死罪, 死罪.” 言未訖, 契丹兵已至, 縛兆裹以氈載之而去, 鉉雲亦被執. 契丹主解兆縛, 問曰, “汝爲我臣乎?” 對曰, “我是高麗人, 何更爲汝臣乎?” 再問, 對如初, 又剮而問, 對亦如初. 問鉉雲, 對曰 “兩眼已瞻新日月. 一心何憶舊山川?” 兆怒蹴鉉雲曰, “汝是高麗人, 何有此言?” 契丹遂誅兆.




〈현종(顯宗)〉 원년(1010) 5월, 거란(契丹) 임금이 강조(康兆)가 임금을 시해한 것을 빌미로 군사를 일으켜 죄를 묻고자 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강조를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이현운(李鉉雲)과 병부시랑(兵部侍郞) 장연우(張延祐)를 그 부사(副使)로, 기거사인(起居舍人) 곽원(郭元)과 시어사(侍御史) 윤징고(尹徵古)와 도관 원외랑(都官員外郞) 노전(盧戩)을 판관(判官)으로, 우습유(右拾遺) 승이인(乘里仁)과 서경장서기(西京掌書記) 최충(崔冲)을 아울러 수제관(修製官)으로 삼았다. 검교상서우복야 상장군(檢校尙書右僕射 上將軍) 안소광(安紹光)을 행영도병마사(行營都兵馬使)로, 어사중승(御史中丞) 노정(盧頲)을 그 부사(副使)로, 병부낭중(兵部郎中) 김작현(金爵賢)과 황보유의(皇甫兪義)를 판관(判官)으로 삼았다. 소부감(小府監) 최현민(崔賢敏)을 좌군병마사(左軍兵馬使)로, 소부소감(少府少監) 최보성(崔輔成)을 그 부사(副使)로, 흥위위녹사(興威衛錄事) 고간(高幹)과 대악승(大樂丞) 김재용(金在鎔)을 판관(判官)으로 삼았다. 형부시랑(刑部侍郞) 이방(李昉)을 우군병마사(右軍兵馬使)로, 형부낭중(刑部郞中) 김정몽(金丁夢)을 그 부사(副使)로, 내알자(內謁者) 유장(柳莊)을 판관(判官)으로 삼았다. 예빈경(禮賓卿) 박충숙(朴忠淑)을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로, 예빈소경(禮賓少卿) 이양필(李良弼)을 그 부사(副使)로, 상서도사(尙書都事) 고연경(高延慶)과 사재주부(司宰注簿) 유백부(庾伯符)를 판관(判官)으로 삼았다. 형부상서(刑部尙書) 최사위(崔士威)를 통군사(統軍使)로, 호부시랑(戶部侍郞) 송린(宋隣)을 그 부사(副使)로, 좌사원외랑(左司員外郞) 황보신시(皇甫申試)와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 원영(元穎)을 판관(判官)으로 삼았다. 군사 30만을 거느리고 통주(通州)로 가서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11월, 거란 임금이 친히 보병과 기병 40만을 의군천병(義軍天兵)이라 이름하여 거느리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흥화진(興化鎭)을 포위하였다. 강조(康兆)는 군사를 이끌고 통주성(通州城) 남쪽으로 나와 전군을 셋으로 나누어 강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한 부대는 통주의 서쪽에 군영을 두고 삼수(三水)의 합류점에 웅거하였으며 강조는 그 가운데에 머물렀다. 한 부대는 통주 근교의 산에 군영을 세우고 다른 한 부대는 통주성 부근에 군영을 두었다. 강조가 검차(劒車)를 일렬로 배치하여 두고 거란군이 쳐들어오면 곧 검차로 함께 공격하니, 모조리 물리치지 않음이 없었다. 거란군이 여러차례 물러나니, 강조는 마침내 적을 얕보는 마음이 생겨 사람들과 바둑을 두었다. 거란의 선봉 야율분노(耶律盆奴)가 상온(詳穩) 야율적로(耶律敵魯)를 거느리고 삼수의 보루를 격파하였다. 진주(鎭主)가 거란군이 쳐들어오고 있음을 알렸으나 강조는 믿지 않고 말하기를, “입안의 음식처럼 〈적군이〉 적으면 좋지 않으니 많이 들어오게 하라.”라고 하였다. 다시 보고하기를, “거란군이 이미 대거 침입하였다.”라고 하니, 강조가 놀라 일어나며 말하기를, “정말인가?”라고 하며 당황하여 마치 목종(穆宗)이 그 뒤에 서서 질책하며 “네 놈은 끝났다. 천벌이 강조를 멀리하겠는가?”라고 하는 것을 본 것 같았다. 강조는 투구를 벗고 꿇어 엎드린 채 거듭 말하기를,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말이 아직 끝나기도 않았는데, 거란군이 이미 들어와 강조를 결박한 후 담요로 싸서 운반해 갔고 이현운(李鉉雲)도 사로잡혔다. 거란 임금이 강조의 결박을 풀어 주며 묻기를, “너는 내 신하가 되겠느냐?”라고 하니 강조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너의 신하가 되겠느냐?”라고 하였다. 재차 물었으나 대답이 처음과 같았으며 또한 칼로 살을 발라내며 물어도 대답은 또한 처음과 같았다. 이현운에게 물으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두 눈은 이미 새로운 해와 달을 보았습니다. 일심으로 섬길 뿐 어찌 옛 산천을 기억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강조가 노하여 이현운을 발로 차며 말하기를, “너는 고려 사람으로 어찌 이와 같이 말하는가?”라고 하였다. 거란은 마침내 강조를 처형하였다. ]_고려사 반역자전 강조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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