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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사서 고려·발해유민 기사 > 권별 보기 > 요사 > 『요사』권15 본기15 성종(聖宗)6 >  ====================== 遼史 > 『遼史』卷15 本紀15 聖宗6 >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강조와 싸우다 hoi cnkb_040_0090_0080 『遼史』卷15 本紀15 聖宗6 統和 28年 11月 乙酉 1010년 11월 10일(음) 상위로 가기 이전으로 가기 다음으로 가기 비교보기 연관사료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강조와 싸우다 大軍渡鴨淥江, 康肇拒戰, 敗之, 退保銅州.校勘 001 대군이 압록강(鴨淥江)을 건너자 강조(康肇)가 맞서 싸웠으나 패배시키자, 물러나서 동주(銅州)에 주둔하였다. 校勘 001 ‘銅州’는 『高麗史』 卷4 世家4 顯宗 元年 11月 己亥 기록에서 ‘通州’로 기재되어 있다. ====================== //책사풍후 주석 : 을유란 말을 왜 빼나? =========================== 『遼史』卷15 本紀15 聖宗6 統和 28年 11月 丙戌 1010년 11월 11일(음) 상위로 가기 이전으로 가기 다음으로 가기 비교보기 연관사료 야율적로가 강조를 사로잡다 肇復出, 右皮室詳穩耶律敵魯擒肇及副將李立,校勘 001 追殺數十里, 獲所棄糧餉·鎧仗. 강조(康肇)가 다시 출병하였으나 우피실 상온(右皮室 詳穩) 야율적로(耶律敵魯)가 강조와 부장(副將) 이립(李立)을 사로잡고, 수십 리를 추격하여 적을 죽이고 버린 군량미와 갑옷, 무기를 노획하였다. 校勘 001 ‘敵魯’는 『遼史』 卷88 列傳18 耶律的琭에서 ‘的琭’으로, ‘右皮室詳穩’은 ‘左皮室詳穩’으로 기재되어 있다. ‘李立’은 『遼史』 卷88 列傳18 耶律的琭 및 耶律盆奴에서 ‘李玄蘊’으로 기재되어 있다. ============================ //책사풍후 주석 : 병술 이란 말을 왜 빼나? 아래 기록들도 싸그리 다 날짜 구절 부분을 뺐네....  원문에 분명 있는데?  ===============...

요사 2국외기 고려전의 고려 거란 전쟁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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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사 2국외기 고려전  //[統和]二十三年(1005), 高麗聞與宋和, 遣使來賀. 중국정사조선전 > 遼史 > 二國外記 > 高麗 > [統和]二十三年(1005), 高麗聞與宋和, 遣使來賀. ============================== ○ [統和] 23년(A.D.1005; 高麗 穆宗 8) 에 高麗에서 [遼나라가] 宋나라와 講和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와 축하하였다. 註  031 [統和] 26년(A.D.1008; 高麗 穆宗 11)에 [高麗에서] 龍鬚草席을 바침과 아울러 中京城을 [쌓은 것도] 축하하였다. 註  032 [統和] 27년(A.D.1009; 高麗 穆宗 12)에 承天皇太后가 崩하자 [遼나라가 高麗에] 사신을 파견하여 國喪을 통보하였다. 註  033 註 031 二十三年 高麗聞與宋和 遣使來賀 : 『遼史』「聖宗紀」統和 23年條에 ‘高麗以與宋和 遣使來賀’라 하였으나,『高麗史』에는 이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參考文獻≫ 『遼史』卷14「聖宗紀」5 統和 23年 5月 丙寅條. 註 032 二十六年 進龍鬚草席 及賀中京城 : 『遼史』「聖宗紀」統和 26年條에는 ‘高麗進龍鬚草席’이라 하였고, 이어서 ‘己巳 遣使賀中京成’이라 하였다. 실상 뒷 文章은 누가 使臣을 보냈는지 불확실한 것이다. 그러나 高麗傳에 나오는 文章으로 비로소 명확하게 해석이 된다. 이 기사도 역시『高麗史』에는 없다. ‘賀中京成’이라는 기사는 원래 ‘城’이었으나, 馮家昇의『遼史初校』와 羅繼祖의『遼史校勘記』에서 모두 ‘成’으로 고쳤다. 이는 도리어 잘못을 저지른 것이나 古文에서는 成은 城과 相通한다. 『遼史』「地理志」에 의하면 聖宗이 七金山 土河 기슭을 지나다가 남쪽을 바라보니 雲氣가 있고 郛郭摟闕의 모양을 하고 있어서 建都케 되었는데, 그 役은 燕·薊의 良工을 뽑아다가 2년 동안 공역을 하여 郛郭·宮掖·樓閣·府庫·市肆·廊廡 등을 建築하였다. 결국 統和 25年에 完成하였다. ≪參考文獻≫ 『遼史』卷14「聖宗紀」5 統和 26年 5月 丙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