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 2국외기 고려전의 고려 거란 전쟁 부분
// 요사 2국외기 고려전
//[統和]二十三年(1005), 高麗聞與宋和, 遣使來賀.
중국정사조선전 > 遼史 > 二國外記 > 高麗 > [統和]二十三年(1005), 高麗聞與宋和, 遣使來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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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統和] 23년(A.D.1005; 高麗 穆宗 8) 에 高麗에서 [遼나라가] 宋나라와 講和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와 축하하였다.註 031
[統和] 26년(A.D.1008; 高麗 穆宗 11)에 [高麗에서] 龍鬚草席을 바침과 아울러 中京城을 [쌓은 것도] 축하하였다.註 032
[統和] 27년(A.D.1009; 高麗 穆宗 12)에 承天皇太后가 崩하자 [遼나라가 高麗에] 사신을 파견하여 國喪을 통보하였다.註 033
註 031 二十三年 高麗聞與宋和 遣使來賀 : 『遼史』「聖宗紀」統和 23年條에 ‘高麗以與宋和 遣使來賀’라 하였으나,『高麗史』에는 이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參考文獻≫
『遼史』卷14「聖宗紀」5 統和 23年 5月 丙寅條.
註 032 二十六年 進龍鬚草席 及賀中京城 : 『遼史』「聖宗紀」統和 26年條에는 ‘高麗進龍鬚草席’이라 하였고, 이어서 ‘己巳 遣使賀中京成’이라 하였다. 실상 뒷 文章은 누가 使臣을 보냈는지 불확실한 것이다. 그러나 高麗傳에 나오는 文章으로 비로소 명확하게 해석이 된다. 이 기사도 역시『高麗史』에는 없다.
‘賀中京成’이라는 기사는 원래 ‘城’이었으나, 馮家昇의『遼史初校』와 羅繼祖의『遼史校勘記』에서 모두 ‘成’으로 고쳤다. 이는 도리어 잘못을 저지른 것이나 古文에서는 成은 城과 相通한다.
『遼史』「地理志」에 의하면 聖宗이 七金山 土河 기슭을 지나다가 남쪽을 바라보니 雲氣가 있고 郛郭摟闕의 모양을 하고 있어서 建都케 되었는데, 그 役은 燕·薊의 良工을 뽑아다가 2년 동안 공역을 하여 郛郭·宮掖·樓閣·府庫·市肆·廊廡 등을 建築하였다. 결국 統和 25年에 完成하였다.
≪參考文獻≫
『遼史』卷14「聖宗紀」5 統和 26年 5月 丙寅條; 卷39「地理志」3 中京道條.
金渭顯,『遼金史硏究』1985.
羅繼祖,『遼史校勘記』
馮家昇,『遼史初校』1977.
註 033 十七年 承天皇太后崩 遣使報以國哀 : 『遼史』「聖宗紀」統和 27年條에 ‘遣使報哀于宋·夏·高麗’라 하였다.『高麗史』에는 이 기사가 없다.
≪參考文獻≫
『遼史』卷14「聖宗紀」5 統和 27年 12月 壬辰條.
○ [統和]二十三年(1005), 高麗聞與宋和, 遣使來賀.註 031 二十六年, 進龍鬚草席, 及賀中京城校勘 017註 032. 二十七年, 承天皇太后崩, 遣使報以國哀.註 033
校勘 017 『遼史』卷14「聖宗本紀」統和 26年 5月 己巳條에는 ‘中京成’으로 되어 있다.
註 031 二十三年 高麗聞與宋和 遣使來賀 : 『遼史』「聖宗紀」統和 23年條에 ‘高麗以與宋和 遣使來賀’라 하였으나,『高麗史』에는 이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參考文獻≫
『遼史』卷14「聖宗紀」5 統和 23年 5月 丙寅條.
註 032 二十六年 進龍鬚草席 及賀中京城 : 『遼史』「聖宗紀」統和 26年條에는 ‘高麗進龍鬚草席’이라 하였고, 이어서 ‘己巳 遣使賀中京成’이라 하였다. 실상 뒷 文章은 누가 使臣을 보냈는지 불확실한 것이다. 그러나 高麗傳에 나오는 文章으로 비로소 명확하게 해석이 된다. 이 기사도 역시『高麗史』에는 없다.
‘賀中京成’이라는 기사는 원래 ‘城’이었으나, 馮家昇의『遼史初校』와 羅繼祖의『遼史校勘記』에서 모두 ‘成’으로 고쳤다. 이는 도리어 잘못을 저지른 것이나 古文에서는 成은 城과 相通한다.
『遼史』「地理志」에 의하면 聖宗이 七金山 土河 기슭을 지나다가 남쪽을 바라보니 雲氣가 있고 郛郭摟闕의 모양을 하고 있어서 建都케 되었는데, 그 役은 燕·薊의 良工을 뽑아다가 2년 동안 공역을 하여 郛郭·宮掖·樓閣·府庫·市肆·廊廡 등을 建築하였다. 결국 統和 25年에 完成하였다.
≪參考文獻≫
『遼史』卷14「聖宗紀」5 統和 26年 5月 丙寅條; 卷39「地理志」3 中京道條.
金渭顯,『遼金史硏究』1985.
羅繼祖,『遼史校勘記』
馮家昇,『遼史初校』1977.
註 033 十七年 承天皇太后崩 遣使報以國哀 : 『遼史』「聖宗紀」統和 27年條에 ‘遣使報哀于宋·夏·高麗’라 하였다.『高麗史』에는 이 기사가 없다.
≪參考文獻≫
『遼史』卷14「聖宗紀」5 統和 27年 12月 壬辰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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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統和]二十八年(1010), 誦遣魏守愚等來祭.
중국정사조선전 > 遼史 > 二國外記 > 高麗 > [統和]二十八年(1010), 誦遣魏守愚等來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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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統和] 28년(A.D.1010; 高麗 顯宗 1) 에 誦이 魏守愚 등을 보내와 [承天皇太后]의 제사를 올렸다.註 034 3월에 사신이 와서 장례에 참석하였다. 5월에 高麗의 西京留守 康肇가 그 임금 誦을 弑害하고 제마음대로 誦의 從兄 詢을 임금으로 세웠다.註 035 8월에 聖宗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高麗를 정벌하면서 宋나라에 통보하는 한편 引進使 韓杞를 파견하여 詢에게 宣問하였다.註 036 [이에] 詢이 表를 올려 出兵을 중지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註 037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11월에 大軍이 鴨淥江을 건너 康肇가 銅州註 038에서 항거하였으나 패퇴하였다. 康肇가 다시 [싸우려고] 나오자 右皮室 詳穩 耶律敵魯가 康肇 등을 사로잡고, 도망하는 [군사들을] 수십리 추격하여 [그들이] 버린 군량ㆍ갑옷ㆍ무기 따위를 노획하니註 039 銅州ㆍ霍州ㆍ貴州ㆍ寧州 등註 040이 모두 항복하였다. 이에 詢이 表를 올려 朝會하겠다고 하니 이를 허락하고, 군사들에게 사로잡거나 노략질하는 것을 금지시켰다.註 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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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統和] 28년(A.D.1010; 高麗 顯宗 1) 에 誦이 魏守愚 등을 보내와 [承天皇太后]의 제사를 올렸다.註 034 3월에 사신이 와서 장례에 참석하였다.
5월에 高麗의 西京留守 康肇가 그 임금 誦을 弑害하고 제마음대로 誦의 從兄 詢을 임금으로 세웠다.註 035 8월에 聖宗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高麗를 정벌하면서 宋나라에 통보하는 한편 引進使 韓杞를 파견하여 詢에게 宣問하였다.註 036 [이에] 詢이 表를 올려 出兵을 중지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註 037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11월에 大軍이 鴨淥江을 건너 康肇가 銅州註 038에서 항거하였으나 패퇴하였다. 康肇가 다시 [싸우려고] 나오자 右皮室 詳穩 耶律敵魯가 康肇 등을 사로잡고, 도망하는 [군사들을] 수십리 추격하여 [그들이] 버린 군량ㆍ갑옷ㆍ무기 따위를 노획하니註 039 銅州ㆍ霍州ㆍ貴州ㆍ寧州 등註 040이 모두 항복하였다. 이에 詢이 表를 올려 朝會하겠다고 하니 이를 허락하고, 군사들에게 사로잡거나 노략질하는 것을 금지시켰다.註 041
註 034 二十八年 誦遣魏守愚等來祭 : 『遼史』「聖宗紀」統和 28年條에 ‘高麗遣魏守愚等來祭’라 하였다. 역시『高麗史』에는 없는 기사다.
≪參考文獻≫
『遼史』卷15「聖宗紀」6 統和 28年 2月 己亥條.
註 035 五月 …… 擅立誦從兄詢 : 이 記事는『遼史』「聖宗紀」의 記事와 같다. 그런데『遼史』에는 本紀와 高麗傳 모두 ‘肇’로 되어 있으나,『高麗史』및『高麗史節要』에는 ‘兆’로 기록되어 있다. 高麗人이므로 高麗側 史料가 더 정확할 것이므로 ‘兆’로 하여야 할 것이다.
또 康兆의 당시 職名도 西京留守가 아니었다. 康兆가 入衛의 命을 받을 당시의 官職은『高麗史』에는 西京都巡檢使이고,『高麗史節要』에는 西北面巡檢使라 하였다.
≪參考文獻≫
『高麗史』卷4「世家」4 顯宗 元年條.
『高麗史節要』卷3 顯宗元文大王 元年 5月條.
『遼史』卷15「聖宗紀」6 統和 28年 5月 丙午條.
金渭顯,『遼金史硏究』1985.
註 036 遣引進使韓杞宣問詢 : 『遼史』「聖宗紀」統和 28年條에 ‘遣樞密直學士高正·引進史韓杞宣問高麗王詢’이라 하였다.『高麗史』顯宗 元年條에는 ‘契丹遣給事中高正 閤門引進使韓杞來告興師’라 하여 內容이 서로 조금씩 틀린다.
≪參考文獻≫
『高麗史』卷4「世家」4 顯宗 元年 10月 癸丑條.
『遼史』卷15「聖宗紀」6 統和 28年 9月 辛卯條.
註 037 詢奉表乞罷師 : 『遼史』「聖宗紀」統和 28年條에 ‘王詢遣使奉表乞罷師 不許’라 하였다.『高麗史』顯宗 元年條에는 ‘參知政事李禮均·右僕射王同穎如契丹請和’라고만 되어 있다.
『遼史』의 奉表乞罷師와『高麗史』의 請和는 각각 자국의 입장에서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參考文獻≫
『高麗史』卷4「世家」4 顯宗 元年 10月 癸丑條.
『遼史』卷15「聖宗紀」6 統和 28年 冬10月 丙午條.
註 038 銅州 : 『遼史』「聖宗紀」統和 28年條에 ‘大軍渡鴨淥江 康肇拒戰 敗之 退保銅州’라 하였다. 銅州는 곧 通州이다.『高麗史』顯宗 元年條에도 ‘康兆與契丹戰于通州 敗績就擒’이라는 記事가 있고『高麗史節要』에도 ‘進至通州 出通州城南’이라는 기사가 있다. 이로 보아 銅州가 通州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康肇가 아니고 康兆임도 알 수 있다.
通州의 位置를 李丙燾는 오늘날의 宣川 西北이라 하였다(『韓國史』p.184).
≪參考文獻≫
『高麗史』卷4「世家」4 顯宗 元年 11月 己亥條.
『高麗史節要』卷3 顯宗元文大王 元年 11月條.
『遼史』卷15「聖宗紀」6 統和 28年 11月 乙酉條.
李丙燾,『韓國史』(中世篇), 1961.
金渭顯,『遼金史硏究』1985.
註 039 右皮室詳穩耶律敵魯擒肇等 …… 鎧仗 : 『遼史』「聖宗紀」統和 28年條에 ‘肇復出 右皮室詳穩耶律敵魯擒肇及副將李立 追殺數十里 獲所棄糧餉·鎧仗’이라 하였다. 이 戰役에 대한 자세한 狀況은『高麗史節要』에 나온다.『高麗史節要』顯宗 元年條에 ‘契丹先鋒耶律盆奴 率詳穩耶律敵魯擊破三水砦 …… 丹兵 已至 縛兆矣’라 하여 마치 耶律敵魯가 康兆를 生擒한 것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遼史』「耶律盆奴列傳」에는
(統和)二十八年 駕征高麗 盆奴爲先鋒 至銅州 高麗將康肇分兵爲三以抗我軍 一營于州西 據三水之會 肇居其中 一營近州之山 一附城而營 盆奴率耶律弘古擊破三水營 擒肇 李玄蘊等軍望風潰
라 하여 耶律敵魯가 아니고 耶律弘古로 되어 있다. 다시「耶律弘古列傳」을 보면 ‘耶律弘古 字盆訥隱 …… 後伐高麗 副先鋒耶律盆奴 擒康肇于銅州’라 하였다. 그러면 康兆를 사로잡은 者는 耶律敵魯가 아니고 耶律弘古이어야 한다. 耶律敵魯라는 이름은『遼史』列傳에는 立傳되어 있지 않다.
≪參考文獻≫
『高麗史節要』卷3 顯宗元文大王 元年 11月 己亥條.
『遼史』卷15「聖宗紀」6 統和 28年 11月 丙午條; 卷88「耶律盆奴列傳」·「耶律弘古列傳」
金渭顯,『遼金史硏究』1985.
註 040 銅·霍·貴·寧等州 : 銅州는 앞에서 언급한 通州이다. 또 霍州와 貴州는『高麗史』「地理志」의 安北都護府屬州에 郭州·龜州가 있는데 霍州가 바로 郭州(지금의 郭山)이고, 貴州가 바로 龜州(지금 龜城)이다. 그리고 寧州는『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成宗稱寧州安北大都護府’라 하였다고 한다. 寧이나 安이나 뜻은 같다. 그러므로 寧州는 곧 安州이다. 李弘稙도 寧州를 오늘의 安州로 보았다. 그러나 興化鎭이 靈州로 되고 靈이 寧으로 되었다면 寧州는 安州가 아니라 義州 附近이 되어야 한다.
≪參考文獻≫
『新增東國輿地勝覽』卷52 安州牧建置沿革條.
李丙燾,『韓國史』(中世篇), 1961.
註 041 詢上表請朝 許之 禁軍士俘掠 : 『遼史』「聖宗紀」統和 28年條에 ‘王詢遣使上表請朝 許之 禁軍士俘掠’이라 하였다.『遼史』에는 11月條에 보이지만『高麗史』및『高麗史節要』에는 이 해 12月 甲戌條에 보인다.『高麗史節要』顯宗 元年條에
王 次楊州 河拱辰 奏曰 契丹 本以討賊爲名 今已得康兆 若遣使請和 彼必班師 王筮得吉卦 遂遣拱辰 及高英起 奉表狀 往丹營 行至昌化縣 以表狀 授郞將張旻別將丁悅 先往軍前 告曰 國王 固願來覲 第懼兵威 又因內難 出避江南 差遣陪臣拱辰等 陳告事由 拱辰等 亦惶懼 不敢前來 請速收兵 旻等 未至 丹兵先鋒 已至昌化拱辰等 具陳前意 丹兵 問國王安在 答曰 今向江南 不知所在 又問遠近 答曰 江南太遠 不知幾萬里 追兵乃還
이라 하였다. 시간적으로 1개월의 差가 난다. 이 시간차도 高麗쪽이 먼저여야 하는데 契丹쪽이 먼저로 되어 있다.
≪參考文獻≫
『高麗史節要』卷3 顯宗元文大王 元年 十二月 甲戌條.
『遼史』卷15「聖宗紀」6 統和 28年 11月 辛卯條.
金渭顯,『遼金史硏究』1985.
○ [統和]二十八年(1010), 誦遣魏守愚等來祭.註 034 三月, 使來會葬.
五月, 高麗西京留守康肇校勘 018弑其主誦, 擅立誦從兄詢校勘 019註 035. 八月, 聖宗自將伐高麗, 報宋, 遣引進使韓杞宣問詢.註 036 詢奉表乞罷師,註 037 不許. 十一月, 大軍渡鴨淥江, 康肇校勘 020拒戰于銅州校勘 021註 038, 敗之. 肇校勘 022復出, 右皮室詳穩耶律敵魯校勘 023擒肇校勘 024等, 追奔數十里, 獲所棄糧餉·鎧仗,註 039銅校勘 025·霍·貴·寧等州註 040皆降. 詢上表請朝, 許之, 禁軍士俘掠.註 041
校勘 018 『高麗史』卷4「世家」顯宗 元年 5月條 및 『高麗史節要』卷3「顯宗元文大王」顯宗 元年 5月條에는 ‘兆’로 되어 있다.
校勘 019 『宋史』「高麗傳」에는 ‘誦卒弟詢權知國事’로 되어 있다.
校勘 020 『高麗史』卷4「世家」顯宗 元年 5月條 및 『高麗史節要』卷3「顯宗元文大王」顯宗 元年 5月條에는 ‘兆’로 되어 있다.
校勘 021 『高麗史』卷4「世家」顯宗 元年 11月 己亥條에는 ‘通州’로 되어 있다.
校勘 022 『高麗史』卷4「世家」顯宗 元年 5月條 및 『高麗史節要』卷3「顯宗元文大王」顯宗 元年 5月條에는 ‘兆’로 되어 있다.
校勘 023 『遼史』卷88「耶律盆奴列傳」에는 ‘耶律弘吉’로 되어 있다.
校勘 024 『高麗史』卷4「世家」顯宗 元年 5月條 및 『高麗史節要』卷3「顯宗元文大王」顯宗 元年 5月條에는 ‘兆’로 되어 있다.
校勘 025 『高麗史』卷4「世家」顯宗 元年 11月 己亥條에는 ‘通州’로 되어 있다.
註 034 二十八年 誦遣魏守愚等來祭 : 『遼史』「聖宗紀」統和 28年條에 ‘高麗遣魏守愚等來祭’라 하였다. 역시『高麗史』에는 없는 기사다.
≪參考文獻≫
『遼史』卷15「聖宗紀」6 統和 28年 2月 己亥條.
註 035 五月 …… 擅立誦從兄詢 : 이 記事는『遼史』「聖宗紀」의 記事와 같다. 그런데『遼史』에는 本紀와 高麗傳 모두 ‘肇’로 되어 있으나,『高麗史』및『高麗史節要』에는 ‘兆’로 기록되어 있다. 高麗人이므로 高麗側 史料가 더 정확할 것이므로 ‘兆’로 하여야 할 것이다.
또 康兆의 당시 職名도 西京留守가 아니었다. 康兆가 入衛의 命을 받을 당시의 官職은『高麗史』에는 西京都巡檢使이고,『高麗史節要』에는 西北面巡檢使라 하였다.
≪參考文獻≫
『高麗史』卷4「世家」4 顯宗 元年條.
『高麗史節要』卷3 顯宗元文大王 元年 5月條.
『遼史』卷15「聖宗紀」6 統和 28年 5月 丙午條.
金渭顯,『遼金史硏究』1985.
註 036 遣引進使韓杞宣問詢 : 『遼史』「聖宗紀」統和 28年條에 ‘遣樞密直學士高正·引進史韓杞宣問高麗王詢’이라 하였다.『高麗史』顯宗 元年條에는 ‘契丹遣給事中高正 閤門引進使韓杞來告興師’라 하여 內容이 서로 조금씩 틀린다.
≪參考文獻≫
『高麗史』卷4「世家」4 顯宗 元年 10月 癸丑條.
『遼史』卷15「聖宗紀」6 統和 28年 9月 辛卯條.
註 037 詢奉表乞罷師 : 『遼史』「聖宗紀」統和 28年條에 ‘王詢遣使奉表乞罷師 不許’라 하였다.『高麗史』顯宗 元年條에는 ‘參知政事李禮均·右僕射王同穎如契丹請和’라고만 되어 있다.
『遼史』의 奉表乞罷師와『高麗史』의 請和는 각각 자국의 입장에서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參考文獻≫
『高麗史』卷4「世家」4 顯宗 元年 10月 癸丑條.
『遼史』卷15「聖宗紀」6 統和 28年 冬10月 丙午條.
註 038 銅州 : 『遼史』「聖宗紀」統和 28年條에 ‘大軍渡鴨淥江 康肇拒戰 敗之 退保銅州’라 하였다. 銅州는 곧 通州이다.『高麗史』顯宗 元年條에도 ‘康兆與契丹戰于通州 敗績就擒’이라는 記事가 있고『高麗史節要』에도 ‘進至通州 出通州城南’이라는 기사가 있다. 이로 보아 銅州가 通州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康肇가 아니고 康兆임도 알 수 있다.
通州의 位置를 李丙燾는 오늘날의 宣川 西北이라 하였다(『韓國史』p.184).
≪參考文獻≫
『高麗史』卷4「世家」4 顯宗 元年 11月 己亥條.
『高麗史節要』卷3 顯宗元文大王 元年 11月條.
『遼史』卷15「聖宗紀」6 統和 28年 11月 乙酉條.
李丙燾,『韓國史』(中世篇), 1961.
金渭顯,『遼金史硏究』1985.
註 039 右皮室詳穩耶律敵魯擒肇等 …… 鎧仗 : 『遼史』「聖宗紀」統和 28年條에 ‘肇復出 右皮室詳穩耶律敵魯擒肇及副將李立 追殺數十里 獲所棄糧餉·鎧仗’이라 하였다. 이 戰役에 대한 자세한 狀況은『高麗史節要』에 나온다.『高麗史節要』顯宗 元年條에 ‘契丹先鋒耶律盆奴 率詳穩耶律敵魯擊破三水砦 …… 丹兵 已至 縛兆矣’라 하여 마치 耶律敵魯가 康兆를 生擒한 것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遼史』「耶律盆奴列傳」에는
(統和)二十八年 駕征高麗 盆奴爲先鋒 至銅州 高麗將康肇分兵爲三以抗我軍 一營于州西 據三水之會 肇居其中 一營近州之山 一附城而營 盆奴率耶律弘古擊破三水營 擒肇 李玄蘊等軍望風潰
라 하여 耶律敵魯가 아니고 耶律弘古로 되어 있다. 다시「耶律弘古列傳」을 보면 ‘耶律弘古 字盆訥隱 …… 後伐高麗 副先鋒耶律盆奴 擒康肇于銅州’라 하였다. 그러면 康兆를 사로잡은 者는 耶律敵魯가 아니고 耶律弘古이어야 한다. 耶律敵魯라는 이름은『遼史』列傳에는 立傳되어 있지 않다.
≪參考文獻≫
『高麗史節要』卷3 顯宗元文大王 元年 11月 己亥條.
『遼史』卷15「聖宗紀」6 統和 28年 11月 丙午條; 卷88「耶律盆奴列傳」·「耶律弘古列傳」
金渭顯,『遼金史硏究』1985.
註 040 銅·霍·貴·寧等州 : 銅州는 앞에서 언급한 通州이다. 또 霍州와 貴州는『高麗史』「地理志」의 安北都護府屬州에 郭州·龜州가 있는데 霍州가 바로 郭州(지금의 郭山)이고, 貴州가 바로 龜州(지금 龜城)이다. 그리고 寧州는『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成宗稱寧州安北大都護府’라 하였다고 한다. 寧이나 安이나 뜻은 같다. 그러므로 寧州는 곧 安州이다. 李弘稙도 寧州를 오늘의 安州로 보았다. 그러나 興化鎭이 靈州로 되고 靈이 寧으로 되었다면 寧州는 安州가 아니라 義州 附近이 되어야 한다.
≪參考文獻≫
『新增東國輿地勝覽』卷52 安州牧建置沿革條.
李丙燾,『韓國史』(中世篇), 1961.
註 041 詢上表請朝 許之 禁軍士俘掠 : 『遼史』「聖宗紀」統和 28年條에 ‘王詢遣使上表請朝 許之 禁軍士俘掠’이라 하였다.『遼史』에는 11月條에 보이지만『高麗史』및『高麗史節要』에는 이 해 12月 甲戌條에 보인다.『高麗史節要』顯宗 元年條에
王 次楊州 河拱辰 奏曰 契丹 本以討賊爲名 今已得康兆 若遣使請和 彼必班師 王筮得吉卦 遂遣拱辰 及高英起 奉表狀 往丹營 行至昌化縣 以表狀 授郞將張旻別將丁悅 先往軍前 告曰 國王 固願來覲 第懼兵威 又因內難 出避江南 差遣陪臣拱辰等 陳告事由 拱辰等 亦惶懼 不敢前來 請速收兵 旻等 未至 丹兵先鋒 已至昌化拱辰等 具陳前意 丹兵 問國王安在 答曰 今向江南 不知所在 又問遠近 答曰 江南太遠 不知幾萬里 追兵乃還
이라 하였다. 시간적으로 1개월의 差가 난다. 이 시간차도 高麗쪽이 먼저여야 하는데 契丹쪽이 먼저로 되어 있다.
≪參考文獻≫
『高麗史節要』卷3 顯宗元文大王 元年 十二月 甲戌條.
『遼史』卷15「聖宗紀」6 統和 28年 11月 辛卯條.
金渭顯,『遼金史硏究』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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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政事舍人馬保祐爲開京留守, 安州團練使王八爲副留守.
중국정사조선전 > 遼史 > 二國外記 > 高麗 > 以政事舍人馬保祐爲開京留守, 安州團練使王八爲副留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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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政事舍人 馬保祐註 042를 開京留守로 삼고, 安州團練使 王八을 副留守로 삼았다. 太子太師 乙澟이 騎兵 천명을 거느리고 馬保祐 등을 데리고 開京으로 나아갔다. [開京을] 지키던 장수 卓思貞이 遼나라의 사신 韓喜孫 등 10명을 살해하고註 043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항거하니, 馬保祐 등이 다시 되돌아왔다. 乙澟이 군사를 거느리고 [開京을] 공격하니 卓思貞은 마침내 西京으로 달아났다. [乙澟은 開京을] 포위한지 5일이 되도록 이기지 못하자 城의 서쪽 佛寺에다 군사를 주둔시켰다. 高麗의 禮部郞中 渤海陀失이 와서 항복하였다.註 044 排押ㆍ盆奴 등을 보내어 開京을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開京 서쪽에서 적을 만나 패전시켰다. 詢이 城을 버리고 달아나자, 마침내 開京을 불사라 버리고 淸江으로 와 還軍하였다.註 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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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政事舍人 馬保祐註 042를 開京留守로 삼고, 安州團練使 王八을 副留守로 삼았다. 太子太師 乙澟이 騎兵 천명을 거느리고 馬保祐 등을 데리고 開京으로 나아갔다. [開京을] 지키던 장수 卓思貞이 遼나라의 사신 韓喜孫 등 10명을 살해하고註 043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항거하니, 馬保祐 등이 다시 되돌아왔다.
乙澟이 군사를 거느리고 [開京을] 공격하니 卓思貞은 마침내 西京으로 달아났다. [乙澟은 開京을] 포위한지 5일이 되도록 이기지 못하자 城의 서쪽 佛寺에다 군사를 주둔시켰다. 高麗의 禮部郞中 渤海陀失이 와서 항복하였다.註 044 排押ㆍ盆奴 등을 보내어 開京을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開京 서쪽에서 적을 만나 패전시켰다. 詢이 城을 버리고 달아나자, 마침내 開京을 불사라 버리고 淸江으로 와 還軍하였다.註 045
註 042 馬保祐 : 人的 사항에 대하여 詳考할 수 없다. 그러나 ‘祐’字가『遼史』「聖宗紀」統和 28年條에는 ‘佑’로 기록되어 있고,『高麗史節要』에서도 ‘佑’로 되어 있다. 二種의 史書에서 ‘佑’로 되어 있으므로 ‘佑’가 옳다고 보아야 하겠다.
≪參考文獻≫
『高麗史節要』卷3 顯宗元文大王 元年 十二月 甲寅條.
『遼史』卷15「聖宗紀」6 統和 28年 11月 辛卯條.
金渭顯,『遼金史硏究』1985.
註 043 守將卓思正殺我使者韓喜孫等十人 : 卓思正의 이름 ‘正’은『遼史』「聖宗紀」와 高麗傳에는 ‘正’이지만,『高麗史節要』에는 ‘政’으로 되어 있다. 高麗의 將軍名이므로 高麗側 記錄에 따라야 할 것이다. 韓喜孫에 대한 기록은『高麗史節要』에
丹主 又使韓杞 以突騎二百 至西京城北門 …… 思正 聞杞語 謀諸蔡文 使麾下鄭仁等將驍騎突出 擊斬杞等百餘人 餘悉擒之 無一人還者
라 하였다. 다소의 時差는 있지만 내용상 같은 사건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使者는 喜孫이 아니라 杞이다. 喜孫은 杞의 字일 가능성이 크다. 羅繼祖도 ‘喜孫卽杞也’라 하였다.
≪參考文獻≫
『高麗史節要』卷3 顯宗元文大王 元年 十二月 乙卯條.
『遼史』卷15「聖宗紀」6 統和 28年 11月 辛卯條.
金渭顯,『遼金史硏究』1985.
羅繼祖,『遼史校勘記』1977.
註 044 高麗禮部郞中渤海陀失來降 : 渤海陀失에 대하여『高麗史節要』에는
丹主 次于城西佛寺 思政懼 紿將軍大道秀曰 君自東門 吾自西門出 前後來攻 蔑不勝矣 遂以麾下兵夜遁 道秀 出大東門 始知見紿 又力不可敵 遂率所部 降于契丹 諸將皆潰
라는 기사를 보면 渤海陀失은 곧 大道秀이다.
≪參考文獻≫
『高麗史節要』卷3 顯宗元文大王 元年 十二月條.
金渭顯,『遼金史硏究』1985.
註 045 詢棄城遁走 遂焚開京 至淸江而還 : 『遼史』「聖宗紀」統和 28年條에 ‘遣排押·盆奴等攻開京 遇高麗兵 敗之 王詢棄城遁去 遂焚開京 至淸江 還’이라 하였다. 그러나『高麗史』의 記錄과는 時間差가 많다.『高麗史』에는 顯宗 元年(1010) 12月 壬申日 밤에 王과 王妃가 契丹兵을 피하여 南行하였다고 되어 있다.『高麗史節要』顯宗 元年 12月條에 ‘是夜 王與王妃及吏部侍郞蔡忠順等禁軍五十餘人出京城’으로 되어 있다.『遼史』의 記錄은 統和 28年(1010) 11月로 되어 있으니 1個月의 差가 난다. 그리고『高麗史』에는 契丹主가 入京하여 大廟와 宮厥을 불살랐다는 것은 그 다음해 正月로 되어 있다. 즉,『高麗史』顯宗 2年條에 ‘契丹主入京城 焚燒大廟 宮厥 民屋皆盡’이라 하였다. 이 記事는『遼史』와는 2개월의 차이가 난다.
기사 중의 淸江은 문장이나 사건의 전후사정으로 보아 臨津江으로 比定되어야 하나 文獻上으로는 考證이 어려우며 音이 비슷한 安北府의 淸川江으로 比定하려 하여도 事理에 맞지 않으며, 다만 宣川郡條에 音과 글자가 꼭 같은 淸江이 있으니 역시 부적합하며 鴨綠江을 靑河라 하기도 하였지만 역시 합당치 않다.
≪參考文獻≫
『高麗史』卷4「世家」4 顯宗 2年 春正月 乙亥條.
『高麗史節要』卷3 顯宗元文大王 元年 12月 辛未條.
『新增東國輿地勝覽』卷53 宣川郡·義州府條.
『遼史』卷15「聖宗紀」6 統和 28年 11月 庚子條.
金渭顯,『遼金史硏究』1985.
○ 以政事舍人馬保祐校勘 026註 042爲開京留守, 安州團練使王八爲副留守. 太子太師乙澟校勘 027將騎兵一千, 送保祐校勘 028等赴京. 守將卓思正校勘 029殺我使者韓喜孫等十人,註 043 領兵出拒, 保祐校勘 030等復還. 乙澟校勘 031領兵擊之, 思正校勘 032遂奔西京, 圍之五日, 不克, 駐蹕校勘 033于城西佛寺. 高麗禮部郞中渤海陀失來降.註 044 遣排押·盆奴攻開京, 遇敵于京西校勘 034, 敗之. 詢棄城遁走, 遂焚開京, 至淸江而還.註 045
校勘 026 『遼史』卷15「聖宗本紀」統和 28年 11月條 및 『高麗史節要』卷3「顯宗元文大王」顯宗 元年 11月條에는 ‘馬保佑’로 되어 있다.
校勘 027 「殿本」 및 『高麗史節要』卷3「顯宗元文大王」顯宗 元年 11月條에는 ‘乙凛’으로 되어 있다.
校勘 028 『遼史』卷15「聖宗本紀」統和 28年 11月條 및 『高麗史節要』卷3「顯宗元文大王」顯宗 元年 11月條에는 ‘馬保佑’로 되어 있다.
校勘 029 『高麗史節要』卷3「顯宗元文大王」顯宗 元年 11月條에는 ‘卓思政’으로 되어 있다.
校勘 030 『遼史』卷15「聖宗本紀」統和 28年 11月條 및 『高麗史節要』卷3「顯宗元文大王」顯宗 元年 11月條에는 ‘馬保佑’로 되어 있다.
校勘 031 「殿本」 및 『高麗史節要』卷3「顯宗元文大王」顯宗 元年 11月條에는 ‘乙凛’으로 되어 있다.
校勘 032 『高麗史節要』卷3「顯宗元文大王」顯宗 元年 11月條에는 ‘卓思政’으로 되어 있다.
校勘 033 「殿本」에는 ‘驆’로 되어 있다.
校勘 034 『遼史』卷15「聖宗本紀」統和 28年 11月 庚子條에는 ‘高麗兵’으로 되어 있다.
註 042 馬保祐 : 人的 사항에 대하여 詳考할 수 없다. 그러나 ‘祐’字가『遼史』「聖宗紀」統和 28年條에는 ‘佑’로 기록되어 있고,『高麗史節要』에서도 ‘佑’로 되어 있다. 二種의 史書에서 ‘佑’로 되어 있으므로 ‘佑’가 옳다고 보아야 하겠다.
≪參考文獻≫
『高麗史節要』卷3 顯宗元文大王 元年 十二月 甲寅條.
『遼史』卷15「聖宗紀」6 統和 28年 11月 辛卯條.
金渭顯,『遼金史硏究』1985.
註 043 守將卓思正殺我使者韓喜孫等十人 : 卓思正의 이름 ‘正’은『遼史』「聖宗紀」와 高麗傳에는 ‘正’이지만,『高麗史節要』에는 ‘政’으로 되어 있다. 高麗의 將軍名이므로 高麗側 記錄에 따라야 할 것이다. 韓喜孫에 대한 기록은『高麗史節要』에
丹主 又使韓杞 以突騎二百 至西京城北門 …… 思正 聞杞語 謀諸蔡文 使麾下鄭仁等將驍騎突出 擊斬杞等百餘人 餘悉擒之 無一人還者
라 하였다. 다소의 時差는 있지만 내용상 같은 사건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使者는 喜孫이 아니라 杞이다. 喜孫은 杞의 字일 가능성이 크다. 羅繼祖도 ‘喜孫卽杞也’라 하였다.
≪參考文獻≫
『高麗史節要』卷3 顯宗元文大王 元年 十二月 乙卯條.
『遼史』卷15「聖宗紀」6 統和 28年 11月 辛卯條.
金渭顯,『遼金史硏究』1985.
羅繼祖,『遼史校勘記』1977.
註 044 高麗禮部郞中渤海陀失來降 : 渤海陀失에 대하여『高麗史節要』에는
丹主 次于城西佛寺 思政懼 紿將軍大道秀曰 君自東門 吾自西門出 前後來攻 蔑不勝矣 遂以麾下兵夜遁 道秀 出大東門 始知見紿 又力不可敵 遂率所部 降于契丹 諸將皆潰
라는 기사를 보면 渤海陀失은 곧 大道秀이다.
≪參考文獻≫
『高麗史節要』卷3 顯宗元文大王 元年 十二月條.
金渭顯,『遼金史硏究』1985.
註 045 詢棄城遁走 遂焚開京 至淸江而還 : 『遼史』「聖宗紀」統和 28年條에 ‘遣排押·盆奴等攻開京 遇高麗兵 敗之 王詢棄城遁去 遂焚開京 至淸江 還’이라 하였다. 그러나『高麗史』의 記錄과는 時間差가 많다.『高麗史』에는 顯宗 元年(1010) 12月 壬申日 밤에 王과 王妃가 契丹兵을 피하여 南行하였다고 되어 있다.『高麗史節要』顯宗 元年 12月條에 ‘是夜 王與王妃及吏部侍郞蔡忠順等禁軍五十餘人出京城’으로 되어 있다.『遼史』의 記錄은 統和 28年(1010) 11月로 되어 있으니 1個月의 差가 난다. 그리고『高麗史』에는 契丹主가 入京하여 大廟와 宮厥을 불살랐다는 것은 그 다음해 正月로 되어 있다. 즉,『高麗史』顯宗 2年條에 ‘契丹主入京城 焚燒大廟 宮厥 民屋皆盡’이라 하였다. 이 記事는『遼史』와는 2개월의 차이가 난다.
기사 중의 淸江은 문장이나 사건의 전후사정으로 보아 臨津江으로 比定되어야 하나 文獻上으로는 考證이 어려우며 音이 비슷한 安北府의 淸川江으로 比定하려 하여도 事理에 맞지 않으며, 다만 宣川郡條에 音과 글자가 꼭 같은 淸江이 있으니 역시 부적합하며 鴨綠江을 靑河라 하기도 하였지만 역시 합당치 않다.
≪參考文獻≫
『高麗史』卷4「世家」4 顯宗 2年 春正月 乙亥條.
『高麗史節要』卷3 顯宗元文大王 元年 12月 辛未條.
『新增東國輿地勝覽』卷53 宣川郡·義州府條.
『遼史』卷15「聖宗紀」6 統和 28年 11月 庚子條.
金渭顯,『遼金史硏究』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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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統和]二十九年(1011) 正月, 班師, 所降諸城復叛.
중국정사조선전 > 遼史 > 二國外記 > 高麗 > [統和]二十九年(1011) 正月, 班師, 所降諸城復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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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註 046
- 二十九年正月 班師 所降諸城復叛 : 『遼史』「聖宗紀」統和 29年條에 ‘班師 所降諸城復叛 至貴州南峻嶺谷 大雨連日 馬駝皆疲 甲仗多遺棄 霽乃得渡己丑 次鴨淥江’이라 하였다. 이 기사에 의하면 班師日이『遼史』에는 統和 29年(1011) 正月 乙亥朔(1日)이고,『高麗史』에는 正月 乙酉(11日)이며,『高麗史節要』에는 正月 丁丑(3日)에 班師할 것을 許諾하고, 乙酉(11日)에 退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기사는 高麗側 두 史料의 內容에 따라 正月 乙酉로 해야 할 것이다.
또 丹兵의 退却時에 ‘所降諸城復叛’이라 하였는데, 이는 敵後方에 남아 있던 高麗軍의 抗戰을 그렇게 기록한 것이다. 그 抗戰狀을『高麗史節要』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高麗史節要』顯宗 2年 正月 辛卯條에
龜州別將金叔興 與中郞將保良 擊丹兵 斬萬餘級
이라 하였고, 同月 壬辰條에는
楊規 掩擊丹兵於無老代 斬二千餘級 奪被擄男女三千餘人
이라 하였고, 同月 癸巳條에
規又戰於梨樹 追至石嶺 斬二千五百餘級 奪被擄男女一千餘人
이라 하였고, 또 同月 丙申條에
楊規 又戰於餘里站 斬一千餘級 奪被擄男女一千餘人 是日 三戰皆捷
이라 하였고, 同月 壬寅條에는
楊規 復邀擊丹兵前鋒於艾田 斬一千餘級 俄而 契丹主 大軍掩至 規 與叔興 終日力戰 兵盡矢窮 俱陷陣死之 規 以孤軍 旬月之間 凡七戰 所殺丹兵 甚衆 奪被擄人三萬餘口 獲駞馬 器械不可勝數 丹兵 爲諸將鈔擊 又因大雨 馬駝疲乏 甲仗皆失
이라 하였고, 同月 癸卯條에
乃得渡鴨淥江引去 鎭使鄭成 追之 及其半渡 尾擊之 丹兵溺死者甚衆 諸降城 皆復之
라 하였다.退路에 死傷者가 많았음은 물론이요, 皇帝의 無謀한 親征이 事態의 危急을 가져왔던 것은 틀림이 없다. 오죽하면 皇后와 皇弟 楚國王 隆祐가 來遠城까지 나와서 皇帝를 맞이하였겠는가?
≪參考文獻≫
『高麗史節要』卷3 顯宗元文大王 2年 正月條.
『遼史』卷15「聖宗紀」6 統和 29年 春正月 乙亥條.
金渭顯,『遼金史硏究』1985.
註 047- 至貴州南嶺谷 : 『遼史』「聖宗紀」統和 29年條에는 ‘貴州南峻嶺谷’이라 하였다.
馮家昇은 ‘貴州’는 원래 ‘貴德州’의 誤로 보았다. 그러나「聖宗紀」에는 ‘德’字가 없다. 그리고『遼史紀事本末』에는
地理志有貴德州無貴州云 本漢襄平縣爲公孫度所據 聖宗升爲軍 後更名 今據高麗外記改正
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 ‘貴州’는 契丹領內의 ‘貴州’가 아니고 江東六州 中의 ‘龜州’이다. 이는 考證의 잘못이다. ‘至貴州南嶺谷’을 李丙燾는 ‘龜州 南의 山嶽地帶에 이르러’로 해석하였다(『韓國史』p.185).
≪參考文獻≫
『遼史』卷15「聖宗紀」6 統和 29年條.
李丙燾,『韓國史』(中世篇), 1961.
馮家昇,『遼史初校』1977.
李有棠,『遼史紀事本末』1983, 文海出版社, 臺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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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統和] 29년(A.D.1011; 高麗 顯宗 2) 정월에 군사를 철수시키니 항복하였던 모든 城들이 다시 叛하였다.註 046 군사가 貴州 南嶺谷에 다다르자註 047 큰 비가 연일 내려 비가 개서야 江을 건넜는데, 말이나 낙타들이 지쳐 갑옷과 무기들을 많이 버리고 鴨淥江에 진을 쳤다. [還國하여서는] 사로잡은 사람들을 여러 陵廟에 나누어 배치하고 나머지는 內戚이나 大臣들에게 주었다.
註 046 二十九年正月 班師 所降諸城復叛 : 『遼史』「聖宗紀」統和 29年條에 ‘班師 所降諸城復叛 至貴州南峻嶺谷 大雨連日 馬駝皆疲 甲仗多遺棄 霽乃得渡己丑 次鴨淥江’이라 하였다. 이 기사에 의하면 班師日이『遼史』에는 統和 29年(1011) 正月 乙亥朔(1日)이고,『高麗史』에는 正月 乙酉(11日)이며,『高麗史節要』에는 正月 丁丑(3日)에 班師할 것을 許諾하고, 乙酉(11日)에 退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기사는 高麗側 두 史料의 內容에 따라 正月 乙酉로 해야 할 것이다.
또 丹兵의 退却時에 ‘所降諸城復叛’이라 하였는데, 이는 敵後方에 남아 있던 高麗軍의 抗戰을 그렇게 기록한 것이다. 그 抗戰狀을『高麗史節要』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高麗史節要』顯宗 2年 正月 辛卯條에
龜州別將金叔興 與中郞將保良 擊丹兵 斬萬餘級
이라 하였고, 同月 壬辰條에는
楊規 掩擊丹兵於無老代 斬二千餘級 奪被擄男女三千餘人
이라 하였고, 同月 癸巳條에
規又戰於梨樹 追至石嶺 斬二千五百餘級 奪被擄男女一千餘人
이라 하였고, 또 同月 丙申條에
楊規 又戰於餘里站 斬一千餘級 奪被擄男女一千餘人 是日 三戰皆捷
이라 하였고, 同月 壬寅條에는
楊規 復邀擊丹兵前鋒於艾田 斬一千餘級 俄而 契丹主 大軍掩至 規 與叔興 終日力戰 兵盡矢窮 俱陷陣死之 規 以孤軍 旬月之間 凡七戰 所殺丹兵 甚衆 奪被擄人三萬餘口 獲駞馬 器械不可勝數 丹兵 爲諸將鈔擊 又因大雨 馬駝疲乏 甲仗皆失
이라 하였고, 同月 癸卯條에
乃得渡鴨淥江引去 鎭使鄭成 追之 及其半渡 尾擊之 丹兵溺死者甚衆 諸降城 皆復之
라 하였다.退路에 死傷者가 많았음은 물론이요, 皇帝의 無謀한 親征이 事態의 危急을 가져왔던 것은 틀림이 없다. 오죽하면 皇后와 皇弟 楚國王 隆祐가 來遠城까지 나와서 皇帝를 맞이하였겠는가?
≪參考文獻≫
『高麗史節要』卷3 顯宗元文大王 2年 正月條.
『遼史』卷15「聖宗紀」6 統和 29年 春正月 乙亥條.
金渭顯,『遼金史硏究』1985.
註 047 至貴州南嶺谷 : 『遼史』「聖宗紀」統和 29年條에는 ‘貴州南峻嶺谷’이라 하였다.
馮家昇은 ‘貴州’는 원래 ‘貴德州’의 誤로 보았다. 그러나「聖宗紀」에는 ‘德’字가 없다. 그리고『遼史紀事本末』에는
地理志有貴德州無貴州云 本漢襄平縣爲公孫度所據 聖宗升爲軍 後更名 今據高麗外記改正
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 ‘貴州’는 契丹領內의 ‘貴州’가 아니고 江東六州 中의 ‘龜州’이다. 이는 考證의 잘못이다. ‘至貴州南嶺谷’을 李丙燾는 ‘龜州 南의 山嶽地帶에 이르러’로 해석하였다(『韓國史』p.185).
≪參考文獻≫
『遼史』卷15「聖宗紀」6 統和 29年條.
李丙燾,『韓國史』(中世篇), 1961.
馮家昇,『遼史初校』1977.
李有棠,『遼史紀事本末』1983, 文海出版社, 臺北.
○ [統和]二十九年(1011) 正月, 班師, 所降諸城復叛.註 046 至貴州校勘 035南嶺谷校勘 036註 047, 大雨連日, 霽乃得渡, 馬駝皆疲乏, 甲仗多遺棄. 次鴨淥江, 以所俘人分置諸陵廟, 餘校勘 037賜內戚·大臣.
校勘 035 校勘記에 의하면 諸本에는 ‘貴德州’로 되어 있으나, 『遼史』卷15「聖宗本紀」統和 29年 春正月 乙亥朔條에 의거하여 ‘貴州’로 고친 것으로 되어 있다.
校勘 036 『遼史』卷15「聖宗本紀」統和 29年 春正月 乙亥朔條에는 ‘南峻嶺谷’으로 되어 있다.
校勘 037 「殿本」에는 ‘分’으로 되어 있다.
註 046 二十九年正月 班師 所降諸城復叛 : 『遼史』「聖宗紀」統和 29年條에 ‘班師 所降諸城復叛 至貴州南峻嶺谷 大雨連日 馬駝皆疲 甲仗多遺棄 霽乃得渡己丑 次鴨淥江’이라 하였다. 이 기사에 의하면 班師日이『遼史』에는 統和 29年(1011) 正月 乙亥朔(1日)이고,『高麗史』에는 正月 乙酉(11日)이며,『高麗史節要』에는 正月 丁丑(3日)에 班師할 것을 許諾하고, 乙酉(11日)에 退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기사는 高麗側 두 史料의 內容에 따라 正月 乙酉로 해야 할 것이다.
또 丹兵의 退却時에 ‘所降諸城復叛’이라 하였는데, 이는 敵後方에 남아 있던 高麗軍의 抗戰을 그렇게 기록한 것이다. 그 抗戰狀을『高麗史節要』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高麗史節要』顯宗 2年 正月 辛卯條에
龜州別將金叔興 與中郞將保良 擊丹兵 斬萬餘級
이라 하였고, 同月 壬辰條에는
楊規 掩擊丹兵於無老代 斬二千餘級 奪被擄男女三千餘人
이라 하였고, 同月 癸巳條에
規又戰於梨樹 追至石嶺 斬二千五百餘級 奪被擄男女一千餘人
이라 하였고, 또 同月 丙申條에
楊規 又戰於餘里站 斬一千餘級 奪被擄男女一千餘人 是日 三戰皆捷
이라 하였고, 同月 壬寅條에는
楊規 復邀擊丹兵前鋒於艾田 斬一千餘級 俄而 契丹主 大軍掩至 規 與叔興 終日力戰 兵盡矢窮 俱陷陣死之 規 以孤軍 旬月之間 凡七戰 所殺丹兵 甚衆 奪被擄人三萬餘口 獲駞馬 器械不可勝數 丹兵 爲諸將鈔擊 又因大雨 馬駝疲乏 甲仗皆失
이라 하였고, 同月 癸卯條에
乃得渡鴨淥江引去 鎭使鄭成 追之 及其半渡 尾擊之 丹兵溺死者甚衆 諸降城 皆復之
라 하였다.退路에 死傷者가 많았음은 물론이요, 皇帝의 無謀한 親征이 事態의 危急을 가져왔던 것은 틀림이 없다. 오죽하면 皇后와 皇弟 楚國王 隆祐가 來遠城까지 나와서 皇帝를 맞이하였겠는가?
≪參考文獻≫
『高麗史節要』卷3 顯宗元文大王 2年 正月條.
『遼史』卷15「聖宗紀」6 統和 29年 春正月 乙亥條.
金渭顯,『遼金史硏究』1985.
註 047 至貴州南嶺谷 : 『遼史』「聖宗紀」統和 29年條에는 ‘貴州南峻嶺谷’이라 하였다.
馮家昇은 ‘貴州’는 원래 ‘貴德州’의 誤로 보았다. 그러나「聖宗紀」에는 ‘德’字가 없다. 그리고『遼史紀事本末』에는
地理志有貴德州無貴州云 本漢襄平縣爲公孫度所據 聖宗升爲軍 後更名 今據高麗外記改正
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 ‘貴州’는 契丹領內의 ‘貴州’가 아니고 江東六州 中의 ‘龜州’이다. 이는 考證의 잘못이다. ‘至貴州南嶺谷’을 李丙燾는 ‘龜州 南의 山嶽地帶에 이르러’로 해석하였다(『韓國史』p.185).
≪參考文獻≫
『遼史』卷15「聖宗紀」6 統和 29年條.
李丙燾,『韓國史』(中世篇), 1961.
馮家昇,『遼史初校』1977.
李有棠,『遼史紀事本末』1983, 文海出版社, 臺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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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泰元年(1012), 詢遣蔡忠順來乞稱臣如舊,
중국정사조선전 > 遼史 > 二國外記 > 高麗 > 開泰元年(1012), 詢遣蔡忠順來乞稱臣如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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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泰 원년(A.D.1012; 高麗 顯宗 3) 에 詢이 蔡忠順을 보내와 옛날처럼 稱臣하겠다고 청하므로 詢에게 詔書를 내려 親朝하도록 하였다.註 048 8월에 田拱之를 보내와 表를 올리고 병을 칭하여 朝會하지 못하겠다고 하니,註 049 詔勅을 내려 다시 [高麗의] 6州를 빼앗도록 하였다. [開泰] 2년(A.D.1013; 高麗 顯宗 4)에 耶律資忠이 高麗에 사신으로 가 땅을 요구하다가 얼마 안되어 돌아왔다. [開泰] 3년(A.D.1014; 高麗 顯宗 5)에 資忠이 다시 사신으로 가 전처럼 땅을 요구하였다.註 050 5월에 國舅인 詳穩 蕭敵烈과 東京留守 耶律團石 등에게 詔勅을 내려 鴨淥江에다 浮橋를 설치하고 保州ㆍ宣義州ㆍ定遠州 등지에다 城을 쌓도록 하였다.註 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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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泰 원년(A.D.1012; 高麗 顯宗 3) 에 詢이 蔡忠順을 보내와 옛날처럼 稱臣하겠다고 청하므로 詢에게 詔書를 내려 親朝하도록 하였다.註 048
8월에 田拱之를 보내와 表를 올리고 병을 칭하여 朝會하지 못하겠다고 하니,註 049 詔勅을 내려 다시 [高麗의] 6州를 빼앗도록 하였다.
[開泰] 2년(A.D.1013; 高麗 顯宗 4)에 耶律資忠이 高麗에 사신으로 가 땅을 요구하다가 얼마 안되어 돌아왔다. [開泰] 3년(A.D.1014; 高麗 顯宗 5)에 資忠이 다시 사신으로 가 전처럼 땅을 요구하였다.註 050
5월에 國舅인 詳穩 蕭敵烈과 東京留守 耶律團石 등에게 詔勅을 내려 鴨淥江에다 浮橋를 설치하고 保州ㆍ宣義州ㆍ定遠州 등지에다 城을 쌓도록 하였다.註 051
註 048 開泰元年 …… 詔詢親朝 : 『遼史』「聖宗紀」開泰 元年條에 ‘高麗遣蔡忠順來 乞稱臣如舊 詔王詢親朝’라 되어 있고,『高麗史』顯宗 3年條에는 ‘契丹詔王親朝’라고 되어 있다.
≪參考文獻≫
『高麗史』卷4「世家」4 顯宗 3年 夏4月條.
『遼史』卷15「聖宗紀」6 開泰 元年 4月 庚子條.
註 049 八月 遣田拱之奉表 稱病不能朝 : 『遼史』「聖宗紀」開泰 元年條에 ‘高麗王詢遣田拱之奉表稱病不能朝 詔復取六州地’라 하였다. 또『高麗史』顯宗 3年條에
遣刑部侍郞田拱之如契丹 夏季問候 且告王病不能親朝 丹主怒 詔取興化·通州·龍州·鐵州·郭州·龜州等六城
이라 하였다.
이 高麗傳의 8月은「聖宗紀」에도 8月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高麗史』에는 6月이다. 田拱之의 派遣은 6月이고, 契丹에 가서 詔文을 받아온 것은 8月이어야 한다. 이 記事들은 분리해서 보아야 할 것으로『高麗史』의 잘못이다.
≪參考文獻≫
『高麗史』卷4「世家」4 顯宗 3年 6月 庚子條.
『遼史』卷15「聖宗紀」6 開泰 元年 8月 己未條.
金渭顯,『遼金史硏究』1985.
註 050 二年 耶律資忠使高麗取地 …… 如前索地 : 『遼史』「聖宗紀」開泰 2年條에 ‘遣中丞耶律資忠使高麗 取六州舊地’라고 되어 있고, 同年 8月條에 ‘耶律資忠使高麗還’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얼마 안되어라는 期間은 約 二個月이라 하겠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高麗史』의 記錄은 상당히 다르다. 즉,『高麗史』顯宗 4年條에 ‘契丹使左監門衛大將軍耶律行平來 責取興化等六城’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여기에 세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契丹使臣의 이름 문제이다. 같은 해의 記錄에『遼史』에서는 ‘耶律資忠’이라 하였고,『高麗史』에서는 ‘耶律行平’이라 하였다. 그러나『遼史』列傳에는 耶律資忠만이 立傳되어 있고 耶律行平이라고는 없다. 또『遼史』「耶律資忠列傳」에는
耶律資忠 字沃衍 小字札剌 系出仲父房 …… 資忠博學 工辭章 年四十未仕 聖宗知其賢 召補宿衛 數問以古今治亂 資忠對無隱 開泰中 授中丞 眷遇日隆 初 高麗內屬 取女直六部地以賜 至是 貢獻不時至 詔資忠往問故 高麗無歸地意 由是權貴數短於上 出爲上京副留守 三年 再使高麗 留弗遣 資忠每懷君親 輒有著述 號西亭集 帝與羣臣宴 時一記憶曰 資忠亦有此樂乎 九年 高麗上表謝罪 始送資忠還 帝郊迎 同載以歸 命大臣宴勞 留禁中數日
이라 하여 資忠의 前後의 사실들 즉, 高麗에 使臣으로 오고, 또 돌아가지 못하고, 高麗에 抑留되었던 事實들이 나열되어 있다. 여기에 해당되는『高麗史』의 記錄에는 모두 耶律行平이다. 그렇다면『遼史』의 耶律資忠을 取함이 옳을 것이다.
두 번째는 耶律資忠이 江東六州 問題로 高麗에 使臣으로 온 回數問題이다.『遼史』에 의하면 開泰 2年(1013) 6月 辛酉條에 ‘遣中丞耶律資忠使高麗 取六州舊地’라 하여 처음 高麗에 派遣된 것이 나오고, 그해(1013) 8月 己丑條에 ‘耶律資忠使高麗還’이라 하여 일단 歸國하였다가 그 다음해인 開泰 3年(1014) 2月 甲子條에 ‘遣上京副留守耶律資忠復使高麗取六州舊地’라 하여 다시 高麗에 派遣된다. 그리고 中間 事情은 記錄에 없고, 다만 開泰 9年(1020) 5月 庚午條에 ‘耶律資忠使高麗還 王詢表請稱藩納貢 歸所留王人只剌里 只剌里在高麗六年 忠節不屈 以爲林牙’라 하였다. 여기에서는 資忠이라고 하였다가 또 只剌里라 하였다. 여기에 관해서는『遼史紀事本未』에는
畢沅續通鑑元 據聖宗紀只剌里與資忠分爲二人 接當時自資忠外不聞被留者 資忠小字札剌卽只里 使高麗被留元年歸爲林牙者是也 史或書名 或書字 遂若兩人矣
이라 하였다.『遼史』「耶律資忠列傳」에는 資忠의 小字가 札剌인데, 只剌里는 곧 札剌의 異譯이라 하였다.
그러나『高麗史』의 顯宗 4年(1013) 3月 戊申條에는 ‘契丹使左監門衛大將軍耶律行平來 責取興化等六城’이라 하였고, 또 同年 7月 戊申條에 ‘契丹使耶律行平復來索六城’이라 하였으며, 또 顯宗 6年(1015) 4月 庚申條에 ‘契丹使將軍耶律行平來又索六城 拘留不遣’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가 돌아간 일에 대하여서는 顯宗 11年(1020) 2月條에 ‘遣李作仁奉表如契丹 請稱藩納貢如故 且歸所拘人只剌里 被拘留凡六年’이라 하였고, 또 同年 3月 癸丑條에 ‘歸契丹使耶律行平’이라 하였다. 이렇게 되면 同一人이 耶律資忠·耶律行平·只剌里 세가지 이름으로 나와서 서로 엇갈리게 되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年代도 맞지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高麗史』에서 보이는 顯宗 4年 7月條의 ‘復來索六城’은 解釋할 수 없으며, 顯宗 11年(1020) 2月에는 只剌里가 돌아가고, 同年 3月에는 같은 사람인 耶律行平이 돌아갔다고 하는 것도 아마 3月條가 잘못 揷入된 것이 아닌가 한다.
셋째는 月이 맞지 않는다. 高麗에서 가거나 契丹에서 오는 시간이 대략 1個月差면 맞는 것이다. 그러나 開泰 2年(1013) 6月에 契丹에서 使臣을 보냈다는데 高麗에는 顯宗 4年(1013) 3月에 使臣이 到着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약 3個月의 差異가 난다. 附言하면『遼史』에는 六州를 索取하러 온 使臣이 耶律資忠 밖에 없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高麗史』에서는 耶律行平과 李松茂가 있다. 耶律行平에 대하여는 前述하였거니와 李松茂에 대한『高麗史』의 記錄을 보면『高麗史』顯宗 5年 9月 丙申條에 ‘契丹遣將軍李松茂又索六城’이라 하였고,『高麗史』顯宗 6年 9月 甲寅條에 ‘契丹使監門將軍李松茂來索六城’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는『遼史』에는 없다.
≪參考文獻≫
『高麗史』卷4「世家」4 顯宗 4年·5年·6年·11年條.
『遼史』卷15「聖宗紀」6 開泰 2年·3年·9年條; 卷88「耶律資忠列傳」
金渭顯,『遼金史硏究』1985.
李有棠,『遼史紀事本末』1983.
註 051 五月 …… 城保·宣義·定遠等州 : 馮家昇은『遼史初校』에서 宣義는 保州의 軍名이라 하였고, 이를 뒷받침해 주는『遼史』「地理志」에는
保州 宣義軍 節度 高麗置州 故縣一 曰來遠 聖宗以高麗王詢擅立 問罪不服 統和末 高麗降 開泰三年取其保·定二州 於此置搉場
이라 하였다. 그러면 保·宣義·定州는 마땅히 保州·定州라야 할 것이다. 保州는 지금의 義州라는『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과 지금의 安州郡이라는『讀史方輿紀要』의 기록이 있다. 그러나 義州가 되어야지 安州여서는 안된다. 왜냐하면『讀史方輿紀要』의 定州城條에
定州城 在平壤西北三百餘里 高麗治定東縣 契丹取之 仍曰定州 亦曰保寧軍 後入於高麗 今仍爲定州 西南與義州接界 義州城在平壤西北四百二十里 志云西南爲龍川郡 皆濱鴨淥江
이라 하였다. 같이 契丹의 수중으로 들어간 保·定州가 만약 定州와 安州라 가정할 때 安州는 平壤서 100餘里, 定州는 300餘里, 義州는 420里로 기록하고, 西南으로 義州와 接界한다고 하고, 또 鴨綠江濱에 있다고 하니 모순되는 일이다. 定州에 대해서는 可考키 어려우나 역시 鴨綠江 東岸地域일 것이다. 鴨綠江도 高麗領에 연한 지역이니 매우 막연한 推定이긴 하지만 平壤에서 鴨綠江까지 가는 길이 막혀 있지 않았기 때문에 定州·安州가 되어서는 안된다.
‘開泰六年 蕭合卓軍攻興化鎭不克 師置’, ‘開泰七年 蕭排押與戰于茶 陀二河之間 我軍不利’, ‘開泰三年 資忠復使 如前索地’ 등 매우 많은 問題와 作戰이 江東六州에서 일어났거나 이 땅 때문에 생겨났다. 이런 것으로 보아도 定州 ·安州일 수는 없다. 또 鴨綠江도『高麗史』및『高麗史節要』에는 모두 ‘綠’字이고,『遼史』에는 어떤 때에는 ‘綠’, 어떤 때에는 ‘淥’字를 썼다. 그러나 中國史料에는 ‘淥’字로 쓴 책이 많은 편이다.
≪參考文獻≫
『新增東國輿地勝覽』卷53 義州牧條.
『遼史』卷38「地理志」2 東京道 保州 宣義軍條.
顧祖禹,『讀史方輿紀要』卷38「山東」9 附考外國 保州條.
金渭顯,『遼金史硏究』1985.
馮家昇,『遼史初校』1977.
○ 開泰元年(1012), 詢遣蔡忠順來乞稱臣如舊, 詔詢親朝.註 048 八月, 遣田拱之奉表, 稱病不能朝.註 049 詔復取六州之地. 二年, 耶律資忠校勘 038使高麗取地, 未幾還. 三年, 資忠校勘 039復使, 如前索地.註 050 五月, 詔國舅詳穩蕭敵烈·東京留守耶律團石等造浮梁于鴨淥江校勘 040, 城保·宣義·定遠等州.註 051
校勘 038 『高麗史』卷4「世家」顯宗 4年 3月 戊申條 및 同年 7月 戊申條에는 ‘耶律行平’으로 되어 있다.
校勘 039 『高麗史』卷4「世家」顯宗 4年 3月 戊申條 및 同年 7月 戊申條에는 ‘耶律行平’으로 되어 있다.
校勘 040 『高麗史』卷56 「地理志」에는 ‘鴨綠江’으로 되어 있다. 下同
註 048 開泰元年 …… 詔詢親朝 : 『遼史』「聖宗紀」開泰 元年條에 ‘高麗遣蔡忠順來 乞稱臣如舊 詔王詢親朝’라 되어 있고,『高麗史』顯宗 3年條에는 ‘契丹詔王親朝’라고 되어 있다.
≪參考文獻≫
『高麗史』卷4「世家」4 顯宗 3年 夏4月條.
『遼史』卷15「聖宗紀」6 開泰 元年 4月 庚子條.
註 049 八月 遣田拱之奉表 稱病不能朝 : 『遼史』「聖宗紀」開泰 元年條에 ‘高麗王詢遣田拱之奉表稱病不能朝 詔復取六州地’라 하였다. 또『高麗史』顯宗 3年條에
遣刑部侍郞田拱之如契丹 夏季問候 且告王病不能親朝 丹主怒 詔取興化·通州·龍州·鐵州·郭州·龜州等六城
이라 하였다.
이 高麗傳의 8月은「聖宗紀」에도 8月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高麗史』에는 6月이다. 田拱之의 派遣은 6月이고, 契丹에 가서 詔文을 받아온 것은 8月이어야 한다. 이 記事들은 분리해서 보아야 할 것으로『高麗史』의 잘못이다.
≪參考文獻≫
『高麗史』卷4「世家」4 顯宗 3年 6月 庚子條.
『遼史』卷15「聖宗紀」6 開泰 元年 8月 己未條.
金渭顯,『遼金史硏究』1985.
註 050 二年 耶律資忠使高麗取地 …… 如前索地 : 『遼史』「聖宗紀」開泰 2年條에 ‘遣中丞耶律資忠使高麗 取六州舊地’라고 되어 있고, 同年 8月條에 ‘耶律資忠使高麗還’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얼마 안되어라는 期間은 約 二個月이라 하겠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高麗史』의 記錄은 상당히 다르다. 즉,『高麗史』顯宗 4年條에 ‘契丹使左監門衛大將軍耶律行平來 責取興化等六城’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여기에 세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契丹使臣의 이름 문제이다. 같은 해의 記錄에『遼史』에서는 ‘耶律資忠’이라 하였고,『高麗史』에서는 ‘耶律行平’이라 하였다. 그러나『遼史』列傳에는 耶律資忠만이 立傳되어 있고 耶律行平이라고는 없다. 또『遼史』「耶律資忠列傳」에는
耶律資忠 字沃衍 小字札剌 系出仲父房 …… 資忠博學 工辭章 年四十未仕 聖宗知其賢 召補宿衛 數問以古今治亂 資忠對無隱 開泰中 授中丞 眷遇日隆 初 高麗內屬 取女直六部地以賜 至是 貢獻不時至 詔資忠往問故 高麗無歸地意 由是權貴數短於上 出爲上京副留守 三年 再使高麗 留弗遣 資忠每懷君親 輒有著述 號西亭集 帝與羣臣宴 時一記憶曰 資忠亦有此樂乎 九年 高麗上表謝罪 始送資忠還 帝郊迎 同載以歸 命大臣宴勞 留禁中數日
이라 하여 資忠의 前後의 사실들 즉, 高麗에 使臣으로 오고, 또 돌아가지 못하고, 高麗에 抑留되었던 事實들이 나열되어 있다. 여기에 해당되는『高麗史』의 記錄에는 모두 耶律行平이다. 그렇다면『遼史』의 耶律資忠을 取함이 옳을 것이다.
두 번째는 耶律資忠이 江東六州 問題로 高麗에 使臣으로 온 回數問題이다.『遼史』에 의하면 開泰 2年(1013) 6月 辛酉條에 ‘遣中丞耶律資忠使高麗 取六州舊地’라 하여 처음 高麗에 派遣된 것이 나오고, 그해(1013) 8月 己丑條에 ‘耶律資忠使高麗還’이라 하여 일단 歸國하였다가 그 다음해인 開泰 3年(1014) 2月 甲子條에 ‘遣上京副留守耶律資忠復使高麗取六州舊地’라 하여 다시 高麗에 派遣된다. 그리고 中間 事情은 記錄에 없고, 다만 開泰 9年(1020) 5月 庚午條에 ‘耶律資忠使高麗還 王詢表請稱藩納貢 歸所留王人只剌里 只剌里在高麗六年 忠節不屈 以爲林牙’라 하였다. 여기에서는 資忠이라고 하였다가 또 只剌里라 하였다. 여기에 관해서는『遼史紀事本未』에는
畢沅續通鑑元 據聖宗紀只剌里與資忠分爲二人 接當時自資忠外不聞被留者 資忠小字札剌卽只里 使高麗被留元年歸爲林牙者是也 史或書名 或書字 遂若兩人矣
이라 하였다.『遼史』「耶律資忠列傳」에는 資忠의 小字가 札剌인데, 只剌里는 곧 札剌의 異譯이라 하였다.
그러나『高麗史』의 顯宗 4年(1013) 3月 戊申條에는 ‘契丹使左監門衛大將軍耶律行平來 責取興化等六城’이라 하였고, 또 同年 7月 戊申條에 ‘契丹使耶律行平復來索六城’이라 하였으며, 또 顯宗 6年(1015) 4月 庚申條에 ‘契丹使將軍耶律行平來又索六城 拘留不遣’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가 돌아간 일에 대하여서는 顯宗 11年(1020) 2月條에 ‘遣李作仁奉表如契丹 請稱藩納貢如故 且歸所拘人只剌里 被拘留凡六年’이라 하였고, 또 同年 3月 癸丑條에 ‘歸契丹使耶律行平’이라 하였다. 이렇게 되면 同一人이 耶律資忠·耶律行平·只剌里 세가지 이름으로 나와서 서로 엇갈리게 되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年代도 맞지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高麗史』에서 보이는 顯宗 4年 7月條의 ‘復來索六城’은 解釋할 수 없으며, 顯宗 11年(1020) 2月에는 只剌里가 돌아가고, 同年 3月에는 같은 사람인 耶律行平이 돌아갔다고 하는 것도 아마 3月條가 잘못 揷入된 것이 아닌가 한다.
셋째는 月이 맞지 않는다. 高麗에서 가거나 契丹에서 오는 시간이 대략 1個月差면 맞는 것이다. 그러나 開泰 2年(1013) 6月에 契丹에서 使臣을 보냈다는데 高麗에는 顯宗 4年(1013) 3月에 使臣이 到着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약 3個月의 差異가 난다. 附言하면『遼史』에는 六州를 索取하러 온 使臣이 耶律資忠 밖에 없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高麗史』에서는 耶律行平과 李松茂가 있다. 耶律行平에 대하여는 前述하였거니와 李松茂에 대한『高麗史』의 記錄을 보면『高麗史』顯宗 5年 9月 丙申條에 ‘契丹遣將軍李松茂又索六城’이라 하였고,『高麗史』顯宗 6年 9月 甲寅條에 ‘契丹使監門將軍李松茂來索六城’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는『遼史』에는 없다.
≪參考文獻≫
『高麗史』卷4「世家」4 顯宗 4年·5年·6年·11年條.
『遼史』卷15「聖宗紀」6 開泰 2年·3年·9年條; 卷88「耶律資忠列傳」
金渭顯,『遼金史硏究』1985.
李有棠,『遼史紀事本末』1983.
註 051 五月 …… 城保·宣義·定遠等州 : 馮家昇은『遼史初校』에서 宣義는 保州의 軍名이라 하였고, 이를 뒷받침해 주는『遼史』「地理志」에는
保州 宣義軍 節度 高麗置州 故縣一 曰來遠 聖宗以高麗王詢擅立 問罪不服 統和末 高麗降 開泰三年取其保·定二州 於此置搉場
이라 하였다. 그러면 保·宣義·定州는 마땅히 保州·定州라야 할 것이다. 保州는 지금의 義州라는『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과 지금의 安州郡이라는『讀史方輿紀要』의 기록이 있다. 그러나 義州가 되어야지 安州여서는 안된다. 왜냐하면『讀史方輿紀要』의 定州城條에
定州城 在平壤西北三百餘里 高麗治定東縣 契丹取之 仍曰定州 亦曰保寧軍 後入於高麗 今仍爲定州 西南與義州接界 義州城在平壤西北四百二十里 志云西南爲龍川郡 皆濱鴨淥江
이라 하였다. 같이 契丹의 수중으로 들어간 保·定州가 만약 定州와 安州라 가정할 때 安州는 平壤서 100餘里, 定州는 300餘里, 義州는 420里로 기록하고, 西南으로 義州와 接界한다고 하고, 또 鴨綠江濱에 있다고 하니 모순되는 일이다. 定州에 대해서는 可考키 어려우나 역시 鴨綠江 東岸地域일 것이다. 鴨綠江도 高麗領에 연한 지역이니 매우 막연한 推定이긴 하지만 平壤에서 鴨綠江까지 가는 길이 막혀 있지 않았기 때문에 定州·安州가 되어서는 안된다.
‘開泰六年 蕭合卓軍攻興化鎭不克 師置’, ‘開泰七年 蕭排押與戰于茶 陀二河之間 我軍不利’, ‘開泰三年 資忠復使 如前索地’ 등 매우 많은 問題와 作戰이 江東六州에서 일어났거나 이 땅 때문에 생겨났다. 이런 것으로 보아도 定州 ·安州일 수는 없다. 또 鴨綠江도『高麗史』및『高麗史節要』에는 모두 ‘綠’字이고,『遼史』에는 어떤 때에는 ‘綠’, 어떤 때에는 ‘淥’字를 썼다. 그러나 中國史料에는 ‘淥’字로 쓴 책이 많은 편이다.
≪參考文獻≫
『新增東國輿地勝覽』卷53 義州牧條.
『遼史』卷38「地理志」2 東京道 保州 宣義軍條.
顧祖禹,『讀史方輿紀要』卷38「山東」9 附考外國 保州條.
金渭顯,『遼金史硏究』1985.
馮家昇,『遼史初校』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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